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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지 내용을 이해하는 건 재미있지만, 표현 방법을 공부하는 건 힘들다.

표현 방법에 대한 공부는 개연성이 없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공대를 다니던 시절, 나는 역학 과목들의 이론을 이해하는 것을 좋아했다.

찾아보면 찾아볼수록 끝도 없이 깊어지는 이론들.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만 같던 내용을 결국 이해했을 때의 카타르시즘.

아직 내가 이해한 건 출발점에 불과하고 더 깊은 내용들이 줄지어 있다는 압도감과,

끊임없이 카타르시즘을 느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

 

그러나 공식을 외우고 문제를 푸는 과정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학부 시절에 푸는 문제들은 이론과 깊게 연결되어 있지 않다고 느꼈다.

이론과 문제 풀이가 별개의 것으로 따로 진행되었고, 

동기들은 족보를 가져다 놓고 문제만 미친 듯이 풀어대었다.

나는 문제 풀이에 거부감을 느꼈다.

단지 어떠한 식을 써보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연성 없는 문제들의 나열.

 

4학년이 되고, 종합 설계를 위해 랩실에서 고군분투하던 중 깨달았다.

이론을 이해한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만들 수 없다는 걸.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표현 방법을 알아야만 했다.

 

 

이후에 어느 분야를 공부해도, 이 사실은 진리처럼 어디에나 존재했다.

 

어떤 영상을 만들지, 컷이나 연출을 이해하고 구상하는 것은 재미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카메라를 다루는 법이나, 영상 편집 프로그램 같은 재미없는 것들도 공부해야 한다.

어떤 소설을 쓸지, 이야기를 이해하고 인물과 사건의 세계를 만드는 일은 재미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비문 없는 문장, 다양한 표현법과, 인칭이나 시제, 플롯의 문법을 공부해야 한다.

다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고, 나와 사고방식이 다른 외국인과 대화를 하는 일은 재미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대화가 가능할 만큼 그 나라 언어의 회화를 공부해야 한다.

 

프로그래밍의 원리를 이해하고, 어떻게든 더 효율적이기 위한 사고 흐름을 따라가 보는 일은 즐겁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언어와 문법들을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들은 대체로 단순히 외우는 작업이 많다. 이해의 연장선에 있지 않다. 그래서 지루하다.

하지만 해야 한다. 영혼을 존재하게 해주는 건 육체니까.

 

 

여전히 나는 이해하는 쪽이 더 재미있다.

코드를  짜는 것보다, 객체지향을 이해하고 컴퓨터 구조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이해해 냈을 때의 카타르시즘을 느끼는 것이 더 짜릿하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머리로만 아는 지식은 반쪽짜리이고, 

그것으로는 결코 그 무엇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코딩의 영혼만이 아니라 육체도 좋아해야 한다는 것을.

 

그래도 표현 방법을 왜 공부해야 하는지 알고 나니까,

표현 방법을 공부하는 일에 대한 거부감은 이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