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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새로운 세계의 앞마당을 누비고 있다.

 

나는 극단주의자다.

사회에서 인식되는 극단주의와는 다른 극단주의다.

외부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설득력 있는 것들에는 기꺼이 믿음을 수정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내가 극단주의자가 된 데에는 계기가 있다. 바로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실수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성장한다.

내가 선택한 길이 잘못되었음을 느낀 적이 많다. 그럴 때마다 멈춰 서서 방향을 정비해야 했고,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가장 큰 이유는, 짧은 시야 때문이었다.

진입하기 전의 선택 단계에서 좀 더 멀리 내다보지 못하고, 좁은 미래만 보아서 문제가 일어났다.

당연히 나에겐 먼 미래까지 미리 생각하는 능력이 필요했다. 

선택하기 전에, 그 선택으로부터 1년 뒤의 모습을, 5년 뒤의 모습을, 10년 뒤의 모습을 생각했다.

그러나 먼 미래를 내다보는 것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도대체 먼 미래가 얼마큼 먼 미래를 뜻하는가?

어디까지가 짧은 시야고, 어디까지가 긴 시야인지 답을 내릴 수 없었다. 

이렇듯 모호한 문제들은 대게 쓸데없이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게 한다. 

 

이 문제를 단순화하기 위해서는 조건을 줄 필요가 있었다.

조건이 극적일수록 선택은 단순해지는 법이다.

예를 들면, 무엇을 좋아하느냐가 아니라, 무인도에 가면 가지고 갈 것 세 가지를 고르라는 식이다.

어차피 무인도에 가게 될 일은 없지만,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명쾌하게 세 가지를 추릴 수 있게 된다.

이처럼 나는 어떠한 선택을 할 때, 앞으로 죽을 때까지 그 선택지를 좇으며 살아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렇게 되지는 않겠지만, 이런 극단적 생각은 내가 그 선택을 할지 말지에 대해 선택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직업을 선택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웬만큼 복잡한 직업들도 결국엔 도달하게 되는 끝이 있었다. 그 끝을 찍고 나면 그때부터는 무료와의 싸움이다. 굉장히 오만한 소리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아직까지 내 주변 사람이 나의 이런 생각을 깨주진 못했다. (누군가 깨준다면 적극 환영이다.)

나는 신입사원의 패기 같은 것으로 일단 취직하고 열심히 일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어요, 같은 루트를 탈 수 없다. 

그러다 보니 평생 동안 하게 되더라도 열심히 즐기며 할 수 있는 일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동안 자영업의 세계를 관찰하며 이곳의 무작위성을 보았고, 그 극단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에 실망했다.

나는 분명히 끝이 있으나, 아무리 노력해도 그 끝에 도달할 수는 없는, 그런 것에 목말라 있었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내가 그런 공간을 점유했던 건 내 공상의 세계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런 세계를 현실에서 발견했다.

 

나는 뭐든지 극단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극단주의의 가장 놀라운 점은, 결국 극단을 보고도 선택하는 길이 있다는 점이다.

이곳은 거대하고 두루뭉술하며 각져있다. 나는 이 안에서 어느 곳이라도 원한다면 갈 수 있지만, 어떤 것이라도 이해하기 위해선 깊이 잠수해야 한다. 죽는 순간까지 이곳을 누비고 다녀도 나는 절대 이곳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곳은 내 공상과는 달리 분명히 실체를 가지고 있음에도!

나는 이곳을 자연에 비유하고 싶다.